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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그대와 나는 탈주선을 그린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 12. 10.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보기 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알기 전으로 되돌릴 수도 없다. 무엇인가를 만진다는 것은 손의 감촉이 기억하기 이전으로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와 관계하는 것은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시작되기 전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관계다. 관계는 뒤로 갈 수 없다.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에게는 탈주선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모래시계를 위아래로 돌려놓으면 감쪽같이 그때가 처음인 것처럼 시간이 시작된다. 위와 아래가 바뀌기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고 있었다고 해도 위와 아래를 뒤집는 순간 현재성의 위력은 소멸한다. 분투하며 살았던 시간도 게으른 시간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무용한 생각으로 범벅된 시간도 모두, 모래시계의 위아래를 뒤집어 놓는 사이에 말끔하게 사라지고 다시 0점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내 시간의 0점을 생각한다. 시간을 채우는 일이 비우는 일이고, 끝나는 지점이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모래시계 같은 한 날을 요즘 몇 번씩 보낸 기분이다.

우리의 생이, 하루가 마치 그날의 전부라면 어떨까? 다음 날, 뒤집어 놓은 모래시계처럼 온전히 시작되는 한 날의 생이 다시 시작된다면 어떨까? 그렇다 해도 지금 허락된 이 하루가 그냥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가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 같다. 늘 반복되는 0점에 선다 해도 분명 0점은 어제의 0점과 같지 않다. 0점에서 0점 사이에는 분명 전력 질주하듯 매 순간을 생각하고 선택하고 선택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선택한 것들에게 내가 가진 시간을 던진다.

여기서 시간이란 비단 물리적인 시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시간이 내게 하루라면 하루의 시간은 내 호흡의 시간, 곧 내 생명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던진다는 것은 내 생명을 던진다는 의미고 결국엔 내 전부를 던진다는 얘기다. 선택한 대상이 사람일 때도, 일일 때도, 책일 때도 마찬가지로 내 하루의 범위 안에 있으므로 내 생명을 나누어 가진 셈이다. 이렇듯 그날의 생을 무엇인가와 함께 공유하고 공존하면서 공동의 경험을 한 후에 돌아온 0점이므로 똑같이 출발선에 선다고 해도 나는 결코 똑같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린 저마다의 특이점을 살고 있고 우리들의 관계도 그러하다.

 


관계의 온도는 물질의 상태변화를 전복시킨다.

하염없이 멀기만 한둘 사이, 인력이 거의 작용하지 않아 둘은 가시거리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상태는 기체다. 그러다가 서로의 눈에 비중 있는 존재로 들어오고 호감도의 곡선이 상승세를 타면 둘의 관계 상태는 액체다. 눈에 보이는 거리만큼의 사이를 두고 적당한 인력으로 서로를 잡고 있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칫 기체상태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겠고 되려 영영 자유로운 상태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온한 안정감에 살짝 진저리를 칠 수도 있겠다.

관계의 온도가 점점 상승하면, 이제 둘의 관계는 틈이 없을 만큼 견고해지면서 무형의 단단하면서도 쉬이 변형되지 않는 틀이 만들어진다. 이때의 관계상태는 고체라 말할 수 있다. 고체상태가 된 둘의 관계는 심장의 좌심실이 어찌나 강렬한 에너지로 대동맥의 혈관 벽을 빨리 강타하는지 그 진동이 서로에게 전해지면 그 진동에 몸을 부르르 떠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고체상태까지 다다른 둘의 관계는 웬만해서는 쉽게 흩어지지 않는 비활성 금속처럼 외부의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매혹적인 것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어도 고체 상태의 관계는 그것들을 무화시킴으로써 세상에 둘만 존재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둘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그 대상만 보인다. 이 상태에서 둘의 관계는 매우 안정된 것으로 지극히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관계의 온도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습성이 있다. 왜냐하면, 온도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식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으로 가르쳐 줬다. 조금 빨리와 조금 늦게 사이에서 어쨌든 관계의 온도는 식어가고 관계의 상태는 서로의 인력이 다소 헐거워진 액체상태로 회귀한다.

관계라는 것이 묘해서 관계의 틀이 허물어지면서 거리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면 기하급수적으로 간극이 생기면서 인력이 약해져 버린다. 둘의 관계는 좀처럼 진동을 느낄 수가 없으므로 관계의 온도는 점점 내려간다. 마침내 하염없이 멀어져 버려서 손을 내밀어도 도저히 잡히지 않을 만큼 멀어진 관계는 기체상태가 된다.

기체가 되어버린 관계는 지금이 아니었던 시간은 한 번도 없었으나 그 자리에서 관계는 어제에 두고 기억만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0점으로 돌아온 관계는 눈을 뒤로하고 걸음을 앞으로 내딛어야 한다. 결코, 아무 일도 없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없고 온몸에는 탈주선이 그어져 있다. 특이점의 순간을 지나온 것이다. 언제나 되돌아갈 수 없는 것들에게서는 탈주선이라는 경험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한 날의 끝에서 그대와 나는 탈주선을 그린다.

 


 

글 | 백우인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새물결플러스에서 튜터로 활동하고 있다. 과신VIEW에서는 과학과 예술과 신학이 교차하는 지점을 글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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