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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 Q

[과신Q] 7. 인류원리: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무의미한가?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10. 15.

 

[과신Q] 7. 인류원리: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무의미한가?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얼마 전에 과학자들과 대담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우주와 생명, 그리고 지성의 기원을 논하는 자리였는데,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인류원리는 우주의 역사를 보면 마치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한 특별한 조건을 갖추도록 우주가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는 특성들을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강연을 듣던 대중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인류원리가 인류의 존재에 관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고, 반면 인류원리는 의미 없는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의 반응도 흥미롭습니다. 인류원리는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해석일 뿐만 아니라 일고의 가치가 없는 짜증 나는 주장이라는 약간 과격해 보이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이 인류원리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지적설계론자들의 주장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류원리를 지적설계자(intelligent designer, 신을 지칭합니다)가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탐지해 낸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지적설계론자들은 신의 창조활동을 과학으로 탐지 가능하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는 무리한 주장 때문에 신학적인 면과 과학적인 면, 둘 다 심각한 오류를 범합니다. 신의 창조 행위를 과학이 탐지하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오류가 첫 번째이고, 과학이 밝힌 인과적 관계는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과학을 변증에 사용하는 오류가 두 번째입니다. 이미 많은 비판이 있기 때문에 더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무신론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9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반대 방향에서 지적설계와 같은 오류를 범합니다. 신의 행위는 과학으로 탐구 가능한데 과학적 증거는 신을 명백히 보여주지 않으니, 신의 창조는 반증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결론은 반대지만 같은 오류입니다. 신의 창조 행위를 과학으로 탐지 가능하다는 전제부터 문제가 심각한 것이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류원리는 과학이 아닙니다. 인류가 존재하기에 적합한 매우 특별한 조건을 우주가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입니다. 우주 초기의 물리적 조건이 조금만 바뀌었더라면,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탄소나 산소 같은 원자들은 우주에 생성되지 않고 우주는 (우리가 아는 생화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보면)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로 그 역사가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특별해 보이는, 정교하게 조율된 듯한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과학을 넘어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과학이 발견한 사실들을 종합하고 이해하려는 지성적 작업의 결과가 인류원리입니다. 지적설계론자들과 다르게, 인류원리를 처음 제시한 그 어느 과학자도 인류원리를 과학이라고 부르거나 과학의 영역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존재할 특별한 조건을 우주가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은 과학적 결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이상학적 해석은 무의미할까요? 과학을 넘어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은 쓸데없는 일일까요? 형이상학은 그저 주관적이고 확실하지 않은 분야에 불과하니, 과학적 설명에만 만족하고 거기서 멈춰야 할까요?

 

물론 그렇게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흔히 과학 아래 다른 학문들을 통합시키려고 하는 용감한 주장이 그렇습니다. 글쎄요. 그런 방식의 통섭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이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되어 있고 과학적으로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들도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일인가? 불의 앞에서 희생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추구할 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과학이 명료한 답을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그저 자연세계의 작동원리와 인과관계를 설명해 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과학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우주의 원리를 하나하나 파악해 가려는 지적 노력이지만 우주를 밝히는 일 그 자체가 우리가 과학을 하는 목적의 전부는 아닙니다. 과학은 인간이 하는 지적 노력이며 과학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과학이 밝힌 결과에 대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해석하는 일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당연한 지성적 작업입니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혹은 이번에 취업시험에 떨어졌다면 혹은 아이가 아프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가 매일 겪는 사건은 과학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고가 났다면 과속이 원인이었는지 혹은 부주의가 원인이었는지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떨어졌다면 준비를 게을리했는지 혹은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묻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아프면 면역력이 약해진 건지 다른 원인이 있는지 당연히 묻고 파악하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우리 사고의 일차적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밝혀지고 과학적 설명이 제시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지적 작업이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발생한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게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삶을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묻게 됩니다. 교통사고의 어떤 인과관계로 발생했겠만 우리는 그 사건의 의미를 묻습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누가 아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이 그날 거기서 발생한 과학적 설명을 넘어서 우리는 이 사건이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묻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시공간의 인과관계에 따라 의미 없이 움직이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그 일이 발생한 과정을 과학이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일이 발생한 의미를 묻습니다.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일이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지성적 작업입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문학은 우주의 변화과정을 밝혀주고 우주론은 초기 우주의 물리적 조건을 알려줍니다. 과학으로 파악되는 그 우주에서 생명이 탄생했고 지성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은 수천 년의 지성사를 거치며 과학을 발전시켰고 우주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 인류가 우주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과학은 우주가 인류를 출현시키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우주의 역사가 흘러왔다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 과학적 설명을 넘어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인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습니다.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과학이 발견한 내용의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일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지적 작업입니다.

 

종종 과학자들 중에는 과학을 모든 학문의 제왕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학이 보여준 눈부신 성공은 당연히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더더욱 과학에 힘을 써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넘어서 과학이 제시하는 결과를 종합하고 이해하려는 작업은 훨씬 포괄적이고 형이상학적입니다. 오히려 과학적 설명을 넘어 그 내용이 우리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묻고 해석하는 지적 사유가 훨씬 더 중요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인류원리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과학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해석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보는 견해는 과학주의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과학의 결과들을 놓고 깊이 사유하며 이것이 인류에게 주는 의미들을 고찰해야 하고 어느 방향으로 우리의 역사를 밀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는 지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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