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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북클럽 이야기

분당/판교 북클럽 이야기 (18-10)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8. 10. 17.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 김란희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시월의 어느 날 밤 분당/판교에 눈빛 형형한 독서쟁이들이 모였습니다.

반가운 a new-face가 오셔서 우리는 오늘도 첫 만남처럼 각자를 재미나게 소개하면서 독서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화학을 전공했고 기병대를 생각하시면 기억이 날 겁니다. 기독교 변증에 대한 관심이 여기까지 오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저도 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치는데 그들의 질문에 정직하고 정확하게 답해 주고 싶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전 칠성 사이다를 생각해주세요.

전 동네사람인데 동네에 있는 유일한 독서모임이고 목사 후보생으로 신학을 위한 지성의 깊이를 더하고 싶어 오게 되었습니다. 못난이로 기억해주세요.

공학박사로 연구원으로 있고 주중 느헤미야 강의로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성경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싶다는 열정이 느헤미야를 알게 했고, 그 앎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도 컴퓨터 공학을 했고 과학적 사고가 강한 안티 크리스찬인 남편에게 기독교를 제대로 알려 주고 싶어왔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책을 인상 깊게 읽던 중 마침 그 분의 책으로 독서모임을 한다고 해서 한달음에 왔습니다.

저는 과신대 분당판교 부지기로 방금 임명 받은 정통 인문학을 공부한 철학적 사유자입니다. 이 바닥에 많이 계시다는 박사는 아니지만 향학열은 높아 이것저것에 관심이 많아 앎을 위한 주파수를 세우던 중 지기님과 신부님의 소개로 과신대를 소개받아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성공회로 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인식의 외피를 걷어내는 귀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저도 공학을 전공한 프로그래머로 북카페 지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오늘 참석한 6인의 자기 소개였습니다. 전체 멤머 15인.



오늘은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인간, Great Mystery>를 석기병 님의 발제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저자는 ‘인간이란 본질적 특성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로서, 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탐색한다.’로 인간에 대한 간략한 정의와 함께, 심리학의 경험적 연구를 동원하여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한 부분이라 느끼게 해주는 Big Picture('큰 그림')을 갈망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길 위의 존재로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세상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을 하지만, 자신과 세상을 실제 모습 그대로 보려면 외적인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신적 계시,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주어야 비로소 세상은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의 모양으로 우리 역사 세계에 들어오셔서 비로소 발코니가 아닌 길에서 우리 실존을 납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자연과학의 통찰을 받아들이되, 기독교 신학으로 인간 본질의 '큰 그림'을 통섭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 설명과 주관적 체험, 지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죠.


존 알렉산더 매케이는 “발코니와 길”이라는 유명한 비유를 통해 발코니는 ‘완벽한 관찰자’로 과학이고, 그에게 생과 우주는 영원한 연구와 숙고의 대상이나 발코니 아래 거리의 삶은 흥미를 갖고 바라보는 관찰대상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발코니는 특권적 위치로서, 이 위치에서 우리는 발아래 광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발코니는 하나님 시점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보는 풍경은 보는 사람 자신이 몰두해 있는 풍경이나 우리는 그 여정의 참여자이며, 거기에 더하여 우리의 시야는 길에서 보이는 것들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제한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관점과 함께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여자 모두 가장 흥미로워 한 부분이라 길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도정에 서 있기에 우리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삶의 진면목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가능한 것인데, 이 지점에 신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피조물이기에 창조주의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성육신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내주를 그리도 갈구하게 되는가 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들의 독서 토론은 매우 활발했습니다. ‘길 위에 있는’ 우리가 발코니에 서 계신 하나님의 시선을 닮아 생에 대한 통찰력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저자가 말하는 “큰 그림을 찾는” 순례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역사에 있어 ‘진보’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진보’는 어떤 개념인가 세속사의 ‘진보’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죄’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본질인가, 아니면 생존의 기재인가, 저자가 지지하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 휴머니즘으로부터 교육을 통한 인간 변화론은 어떻게 볼 것인가까지 그 주제에 따라 묵직한 대화가 많이 촉발되었습니다. 진지하게 읽고 사색할수록 인간에 대한 탐구가 깊어지고 그만큼 하나님께도 다가갈 수 있는 책으로 10월 달 분당 독서모임은 또 한 번 책 선정의 “엄지 척”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후기는 발제 내용을 중심으로 적었습니다. 석기병 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11월은 김근주 교수님의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가 선정되었습니다. 많은 분들께 참여를 강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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